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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일(吳快一)·정명섭(丁明燮) 등이 차례로 등 단하여 '부상자 문제'와 '금후의 연락방법' 등을 결의하고 대오를 지어 귀가하였다. 그리고 이날 박상기(朴相琦)와 최상을 (崔相乙) 등 30여명은 광주역에서 일본인 순사와 역원을 구타하였고, 일본인 중학생 1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929년 11월 3일 전개된 광주 학생의 제1차 가두 투쟁은, 오전의 투쟁이 부분적 투쟁이라면 오후의 투쟁은 전체적인 투쟁 이라 할 수 있다. 11월 3일 오후의 투쟁은 동맹 휴교 투 쟁에서 실력 투쟁을 거쳐 집단적 가두 투 쟁의 단계로 발전시킨 광주 학생들의 새 로운 대일 항쟁의 장이 벌어진 것이다. 이 를 기점으로 항일 학생운동은 중대 국면 에 접어들었다. 11월 3일 밤 도당국은 광주중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 양교에 대해 3일간 임 시 휴업을 지시하고 학부형과 학생들에게 다각적인 선무책을 강구하도록 했으나 실 효가 없었다. 이에 다시 3일간의 휴업을 더 연기하여 11월 11일부터 수업을 재개 하기로 하고 일면탄압·일면선무의 양면책 을 썼다. 한편, 11월 3일 가두 투쟁에서 39명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1명의 광주농업 학교 학생이 구속되었다. 일제 측의 이러 한 탄압은 항일 학생들의 항쟁 심을 꺾기 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이 보다 발전된 차 원에서 대일 항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하 였다. 즉, 광주의 학생 가두 투쟁을 민족 독립 운동의 차원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신간회 지부·청년단체·사회단체가 혼연일체가 되 어 광주 투쟁의 전국화에 힘썼고, 따라서 학생들이 이러한 민족적 요청을 전위적으 로 제고시켜 나가는 행동력을 담당하기로 한 것이다. 11월 3일 사태 이후 광주 청년계에 영향 력을 가졌던 장석천(張錫天)·장재성·강석원 (姜錫元) 등은 시내 금동에 '학생투쟁지도 본부'를 설치하고 광주 학생 투쟁을 항일 민족운동의 전국화라는 방향으로 확대, 발 전시키기 위하여 각기 지도 업무를 분담 하였다. 장석천은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 지 도, 장재성은 광주 학생 행동지도, 국채진 (鞠埰鎭)은 전라남도 내 지방 학생의 지 도, 박오봉(朴五鳳)은 직공 및 노동 단체 의 지도, 임종근(林鍾根)은 전라남도 내 공립보통학교 교사와의 연락, 강석원은 외 래 동지와의 연락, 나승규(羅承奎)는 운동 자금 조달을 각각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광주 학생운동은 학생이 항일 선도 세력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해 나가고, 민족 각 계층에서도 광범위한 참여가 있 어 공동 투쟁의 단계에 돌입하였던 것이 다. 이와 같은 계획으로 11월 12일 오전 10시를 기하여 제2차 시위는 조직적으로 과감히 전개되었다. 치밀한 준비 작업 끝에 격렬한 항일 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