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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그러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그 들을 추격하여 계속 구타를 가했다. 그때 시찰 중인 광주경찰서원과 교사들이 제지 를 하였지만, 이를 뿌리치고 역 구내로 도 망친 광주중학 학생들을 개찰구를 뛰어넘 어 닥치는 대로 때려 눕혔다. 급보를 전해들은 광주중학 기숙사생 백 수십명은 목도(木刀)와 단도 등을 들고 유 도교사를 선두로 '고보생타도'를 외치면서 충돌 현장으로 달려왔다. 또한, 광주고등 보통학교 기숙사생들과 시내의 광주고등 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이 소식 을 듣고 역 앞으로 몰려왔다. 이들 양교 학생들은 중학교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성저리 십자로 부근의 작은 흙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그러나 학생 외의 당사자들의 교섭으로 동시 퇴 각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날 한·일학생 가두 투쟁으로 발생한 부상자는 광주중학 교측은 16명, 광주고등보통학교측은 10명 이었다.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들은 노병주의 사회로 집회를 열어 가두 시위 투쟁을 결행하기로 하고 김병기(金炳 基)·강윤석(康潤錫)·김용대(金容大)·김상환 (金相奐) 등의 지휘로 목봉과 검도 도구 등으로 무장, 시가전을 각오하고 오후 1시 대오를 정비하여 300여명의 학생들이 교 문을 박차고 나섰다. 추진력이 강한 김향남·김보섭·김상섭(金 相燮)·강윤석·김무삼(金戊三) 등이 선두에 서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광주농 업학교 학생 일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 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운동가를 고 창하며 행진해 나갔다. 원래 광주 학생들의 가두 행동대는 충 장로를 거쳐 광주역을 돌아 광주중학교를 습격할 계획이었으나, 경찰이 소방대·재향 군인까지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방어를 하 였다. 때문에 진로를 바꾸어 일본인 소학 교(지금의 중앙초등학교)를 돌아 광주중학 교로 다시 진공해 들어가려고 했으나 역 시 실패하였다. 그런데 가두 행동대가 충장로와 우체국 을 거쳐 도청 옆의 상품진열관부근에 이 르렀을 때, 그곳에 있던 광주사범학교 학 생 100여 명의 호응을 받았다. 또, 메이지 절 기념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여자고 등보통학교 학생들 일부가 행동대에 가담 하였다. 광주 학생들의 호응 속에 숫자가 불어 난 가두 행동대는 도립병원 앞으로 나와 다시 광주중학교 습격을 시도했으나 경찰· 소방대 등의 완강한 방어에 부딪히게 되 었다. 그러나 행동대는 계속 함성을 지르 고 일전불사의 기세로 시위를 했으며, 연 도의 군중은 이들의 결연한 항쟁을 지지, 성원하였고, 일본인 상인들은 폐점 상태에 들어갔다. 행동대는 가두에서 강력한 제지 와 해산명령 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금동 을 지나 광주고등보통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 학생 들은 교문에서 해산하고 광주고등보통학 교 학생들은 강당에 집결하여 김향남·오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