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page

- 47 - 히 동시 퇴각을 결정하였다. 그 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이러 한 사태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학교 로 돌아가 5학년 학생 노병주(盧秉柱)와 통학생 단장 채규호(蔡奎鎬) 등이 사실을 보고하고, 의견을 교환하였으나 묘안 없이 귀가하였다. 11월 2일 하학 열차에는 양교 교사와 경찰이 동행하였으며, 아침에는 전라남도 지사가 양교 교장에게 통학생들에 대한 엄중한 감독을 지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형식적이며 관료적 차원에 서의 수습책이 광주 학생들의 굳은 민족 의식에 기조를 둔 대일항쟁정신을 퇴화시 키거나 변질시킬 수는 없었다. 1929년 10월 30일 이후 고조되어 가던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들 의 대일항쟁심은 '독서회중앙본부'의 적극 적인 활동으로 하나로 뭉쳐져 1929년 11 월 3일 대항일 학생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몇 가지를 함께 의미하 는 날이기도 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메이지절[明治節]이었고, 우리 민족으로서는 마침 음력 10월 3일로 개천절이었으며, 광주 학생들의 독서회원 들에게는 전신인 성진회 창립 3주년이 되 는 날이었다. 이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메이 지절 기념식 후에 있을 신사 참배를 거부 하고, 지금까지의 산발적이고 소극적인 투 쟁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실력행사에 들어 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이날 오전 11시경 우편국 앞에 서 신사 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16명의 일 본인 중학생들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최 쌍현(崔雙鉉) 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최 쌍현이 광주중학교 학생의 단도에 찔려 코와 안면에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 났다. 소식을 전해들은 주변의 광주고등보통 학교 학생들은 도주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쫓아가 구타하자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 역쪽으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