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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이러한 사건 등으로 인해 광주지방의 한·일학생간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 으며, 특히 광주주변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우리나라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관계는 긴박한 긴장감마저 돌게 되었다. 이러한 한·일학생간의 대립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경 광주발 통학열차 가 나주에 도착하였을 때 폭발하였다. 이날 나주역에서 통학생들이 집찰구로 걸 어나올 때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여자 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박기옥(朴己玉). 이금자(李錦子).이광춘(李光春) 등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 롱을 하였다. 그때 역에서 같이 걸어 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4촌 남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 교 2학년생인 박준채(朴準埰) 등이 격분하 여 이들과 충돌하였다. 그때 출동한 역전 파출소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며 박준채를 구타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최희선 (崔熙善). 김보섭(金普燮) 등 10여 명이 박준채와 합세하여 한·일학생간의 대결이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의 큰 충돌은 일어 나지 않았다. 그러나 11월 1일의 광주역사건으로 사 태는 급전되었다. 당일 통학생도 아닌 일 본인 중학 5학년 학생 4, 5명이 광주고등 보통학교의 정세면(鄭世勉)에게 도전해 옴 으로써 한·일학생간의 충돌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양교의 교사들이 충돌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현장에 왔으나 일본인 중학교 교 사들은 중학생들을 오히려 선동하였으며, 교사끼리의 교섭도 일본인 중학교 교사들 의 교만한 방언으로 옥신각신하다가 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