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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하여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적극적 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계에서 일어난 항일 의식은 동맹휴교 와 항일 운동이 고조되어 간 1927년과 1928년에 더욱 성숙해 갔다. 1927년 2월 5일 밤 소등 후에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광주사범학교 학생 윤형남(尹亨南)을 일본 인 체육 교사가 지나치게 모욕적인 언사 로 단속을 가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광주 사범학교 기숙사생 150명이 "조선인 본위 의 교육을 실시하라!", "노예 교육을 철폐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같은 해 5월 하순에는 광주고등보통학 교 2·3학년생들이 '한·일학생교육제도와 시설의 차이'를 지적하며 동맹휴교에 들어 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주고등보통학교 의 본격적인 항일동맹휴교운동은 1928년 6월의 이경채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이경채는 광주와 송정리 등에서 발생한 불온문서사 건에 관련되어 구속되고, 학교 당국으로부 터 퇴학당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이경채 권고 퇴학의 이유를 밝 히라며 전교생이 동맹휴교에 돌입하였다. 이어 광주농업학교에서도 비슷한 요구 조 건으로 동맹 휴교에 돌입하였다. 이렇듯 광주 학생들의 동맹휴교가 확대 되자, 학부형·동창회 및 재동경 광주고등 보통학교의 졸업생까지 개입된 동맹휴교 중앙본부가 발족되었다. 동맹휴교중앙본부 가 설치되자 동맹휴교는 학교 내부 및 광 주 지방의 차별 교육 문제에서 탈피하여 식민지 교육 체제와 통치 기구에 대한 항 쟁으로 성격이 변화, 발전하였다. 학생 동맹 휴교는 매우 조직적이며, 지 속적인 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동맹휴교 정신도 명백해져 식민지 노예 교육을 거 부하고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요구하였다. 1927년과 1928년 사이에 국내 항일 민 족운동의 고조된 분위기와 맹렬한 호남의 항일 풍조 토대 위에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가 주축이 되어, 4개월간 전 개된 동맹 휴교 투쟁은 학생계의 항일 의 식을 명백하게 부각시켰으나 일제 당국의 폭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29년에 들어서도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들의 항일 기운은 조금 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러던 1929년 3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김몽길(金夢吉)·여 도현(呂道鉉) 등이 교규문란의 이유로 퇴 학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교내는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며 긴장이 계속되다가 광주학생동맹 휴교 1주년이 되는 6월 26일 5학년을 비 롯하여 2·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하학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또, 이날 통학열차가 운암역을 통과할 때 일본인 중학생 하나가 "한국인은 야만 스럽다"라는 말이 문제가 되어 일본인 중 학생과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들의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