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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식열을 봉쇄하거나 해치는 교육정책은 한 국 학생의 저항을 필수적으로 불러일으키 는 것이었다. 1928년 4월경 광주와 송정리 등에서 항일 격문을 뿌린 사건에 연루된 이경채 (李景采) 등 8명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특히,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 던, 이경채가 『조선독립선언문』의 작성과 살포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1928년 6월 동맹휴교운동에 들어갔다. 또, 1928년 4월 28일에는 임실청년회관 에서 제4회 전라북도 기자 정기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일제는 전라북도 기자 대회의 토의 사항과 강령이 불온하다 하 여 기자 대표 6명을 경찰의 취조 뒤 송국 (送局)하였다. 전라북도기자대회사건으로 말미암아 국내 언론계뿐 아니라 호남 지 방의 항일적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때 평안북도 의주 출신인 조인현(趙仁 賢)이 3년 동안 이리·김제 등지에서 공작 을 전개하며,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착취 기관인 동양척식회사 지점을 비롯한 관공 서를 습격할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하고 총기를 밀수입하는 등 구체적으로 준비를 진행시키던 중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은 국내에서 조직 공작을 통 해 무력 투쟁을 전개하려고 했다는 점에 서 전라남북도 지방에 걸쳐 큰 자극을 주 었다. 한편, 1928년 8월 5일 전라남도 소년연 맹 창립총회가 경찰에 의하여 금지되자, 전라남도 각 지방의 소년운동대표자들은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서 간담회를 열었 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이들 대표자들을 강제 연행하였다. 그 뒤 가혹한 취조 끝에 정홍교(丁洪 敎)·고장환(高長煥)·유혁(柳赫) 등 8명이 중앙에서 파견된 사실을 알아내고 이들을 광주지법 검사국으로 송국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28년대 전라남북도에서 일 어난 이상의 민족적 결사 운동과 항쟁, 그 리고 일제의 탄압은 광주학생계에 고무적 인 충격과 용기를 심어 줬을 것이다. 광주 학생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학생 결사 성진회(醒進會)는 항일·반식민 지·민족독립이라는 한민족 공통의 대국적 상황을 학생의 처지에서 집약한, 그리고 광주학생계의 현실에서 조직된 결사체로 1926년 11월 조직되었다. 다음 해에 독서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 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목포상업학교 등에 하부 조직을 두고, 김기권(金基權)과 장재성(張載性)은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어 자금 조달에 노력하였다. 1928년 11월 초 광주학생계의 이와 같 은 항일적 분위기에 맞추어 광주여자고등 보통학교 학생 장매성(張梅性).박옥련(朴玉 蓮).박계남(朴繼男) 등 11명이 주도하여,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쟁취, 그리고 여성 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인 소 녀회를 조직하였다. 소녀회는 동지를 포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