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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1926년 7월 15일 한국 민족의 단일 전 선 기관을 표방하고 실업·종교·청년·형평· 학생·사상의 각 계통을 망라하여, 대동단 결에 의한 민족적 통합 세력을 구축할 것 을 목적으로 명제세(明濟世) 등의 이름으 로 조선민흥회준비위원회(朝鮮民興會準備 委員會)가 결성되었다. 한편, 도쿄에 있던 한국인의 좌파 단체 북성회(北星會)는 1925년 1월 일월회(一月 會)로 개칭하였다. 그후 안광천(安光泉)·하 필원(河弼源)·김삼봉(金三奉) 등의 회원들 도 귀국하여, 1926년 4월 14일 북풍회(北 風會)·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화요회(火曜 會) 등 4개 단체를 통합하여 정우회(正友 會)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다시 많 은 간부를 잃게 되고, 또 일본에 있어서의 무산정파들의 동향도 고려하여 그들 좌파 와 민족주의가 상호제휴함으로써 전 민족 의 역량을 집중하여 경제적 투쟁에서 정 치적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 민족단일전선 결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정우회는 1926년 11월 15일 해체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민흥회· 전진회 등도 해체된 후, 거기에 소속된 회 원들은 신간회의 기치 아래 수용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조선중앙기독 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발기되어 회장 에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에 홍명희(洪命 熹)가 피선되었다. 같은 해 5월 16일 이에 승복하지 않은 좌파들은 속칭 874개 단체 대표들을 모아 조선 사회단체 중앙협의회 창립 대회를 열었고, 5월 27일에는 신간회의 자매 단 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 항일 운동의 전개는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같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 체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는 일제 통치 기구에 협조할 수 있는 최소한 도의 친일적 한국인을 위한 제한된 실무 교육인 간이교육(簡易敎育)을 실시하였다. 또한, 한국인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 일본 제국의 도덕적 기초가 무너지고 일 본인 통치자를 무시하게 된다는 우려 속 에서 식민지주의적 교육정책으로 일관하 였다. 특히, 일제 당국은 3·1운동의 민심 수습 책의 하나로 1면 1교계획(보통학교)을 4년 내 달성할 것을 공포했으나, 10년 뒤인 1928년 현재 전국 2,400여 면에 공립·사 립 보통학교가 도합 1,544개가 있을 뿐이 었다. 이러한 차별적이고 제한적인 식민지 교 육 상황에서 한국인 학생들은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했다 . 1928년 83건의 항일 학생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한국 학생들이 식민지 교육 체제 및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한 민족적 저항 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3·1운동의 좌절 뒤에 등장하는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은 반일제, 독립의 길 을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방향에서 설정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교육열과 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