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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 광주학생 항일독립운동은 살아있는 현대사다. 지금 한국과 일본은 치열한 역사전쟁을 치루고 있다. 독도영유권문제/ 일본위안부문제 등 국제사회에 외교문제 로 飛火되고 있다. 20대 대선에서 친일후 예들의 준동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며 새 로 취임한(岸田文雄, Kishida )기시다내각 도 친일파의 加勢로 군국주의 부활을 선 언하고 군비를 확장하고 있다. 과거군부독 재세력들이 학생운동의 투쟁대상이었기 때문에 광주학생항일독립운동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우리민족은 광주항일독립운동의 독립정 신을 잊어서는 않된다. 1945년 조국이 해 방 되었지만 우리의 힘으로 되지못 하였 다. 이제 대한민국은 제2의 독립정신으로 일본의 준동을 막아야 하는 역사적 소임 을 다 하여야 한다. 바로 자주통일의 길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일제식민통치 36년동안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가 목숨을 잃고 저항했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 광주 학생의 항쟁은 1929년 광주지역의 학생이 주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를 통한 민족의 독립과 이 길을 위해 식민교 육 체제를 반대하고, 민족 교육을 주창하 며 궐기한 항일 독립 만세 운동이었으며 광주에서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 으며, 민족 차별 교육에서 발단하여 민족 독립 만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19년 3·1운동과 1926년의 6·10만세 운동 뒤 일제는 반일적 사상운동과 사회 운동, 그리고 학생운동 등 한국 민족의 대 대적인 반격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 경기 로 비교적 호황을 보이던 일본 경제계에 공황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본 경제의 파국적 위기와 천황제 정치 체제를 위협하는 좌파 세력의 진출은 일 본 정계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일본은 1927년 5월 제1차 산둥출병(第一次山東出兵)을 단행하 여 중국 국민혁명군의 북상을 저지하면서 대륙 침략 정책을 여실히 드러냈다. 1928 년 4월 일본 국내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 고 제2차 산둥출병을 강행하여 영국·미국 과 대립하며 중국 침략에 앞장섰다. 또한, 6월에는 만주에서 특무공작을 전개하여 장쭤린(張作霖)을 폭살 하였고, 7월에는 특별고등경찰(特別高等警察)을 전국에 배치하여 치안 체제를 강화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6·10만세 운동을 전후 하여 한때 국내 사회 운동과 사상운동 선 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좌파에 대한 탄압이 확대됨으로써,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 세력은 새로운 방향에서 재편 성의 기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이 국내에 도 적용, 실시되면서 사유재산 제도를 부 인하려는 국내의 좌파 세력이 탄압을 받 게 되자, 민족주의 진영은 새로운 방향에 서 반일 민족운동을 전개할 방안을 모색 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