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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 제 육군사관학교 최초의 기수인 11기의 지도 아래 하나의 배타적인 파벌집단을 형성하면서 군부내 세력갈등이 표면화되 기 시작하였다. ​ 당시 보안사령관의 자격으로 10·26사태 에 대한 수사를 전담하는 계엄사 합동수 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을 중 심으로 한 새로운 군부세력(신군부)이 기 존의 육군지도부였던 정승화 세력과 갈등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갈등을 일으키게 한 대립의 쟁점은 사건수사와 군의 인사문제 였다. ​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 규(金載圭)의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 고 주장하고, 10·26사태 수사에 소극적이 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10·26사태 당시 정승화는 궁정동 안가의 대통령 시해현장 부근에 대기하였으며 사 건 이후 김재규를 구속할 때 미온적인 태 도를 보이는 등 그 수사를 지연시킨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물론 정승화가 10·26 사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 일 명백히 밝혀졌다). 정승화의 연행을 실행하기 위해 11월 중 순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兪學聖), 1군 단장 황영시(黃永時), 수도군단장 차규헌 (車圭憲),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 한 뒤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 사단장 박준병(朴俊炳), 1공수여단장 박희 도(朴熙道), 3공수여단장 최세창(崔世昌), 5공수여단장 장기오(張基梧) 등과 사전 접 촉하였다. ​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 처장 이학봉(李鶴捧)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許三守),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 록 지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