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page

- 34 -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鄭昇和)와 사전 모의는 하지 않았으며 단지 ‘거사 후 연대’를 시도하기 위해 10·26 당일에 궁정동 안가의 별실에 초대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승화는 연대를 거부해 쿠데타로 진행되지는 못하였으며, 결국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집권하는 빌미를 만들어 주었다. 10·26사태로 민주화가 되기보다는 권위주의 통치가 연장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시해 는 박정희의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후속 정권도 이러한 역사적 선례를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김재규 일당은 사형되고 10·26사태에 대한 법적 심판은 일단락되었다. 법적 심판은 그렇다 하더라 도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 있 다. 10·26사태의 마무리 과정 에서 12·12사태가 일어나는 등 민주화가 지체되기도 하였 지만 10·26사태 자체는 민주 화를 요구하였던 부마항쟁으 로 촉발되었고 보다 장기적으 로는 유신체제의 붕괴와 군부 독재 종식의 한 계기가 되었 다는 차원에서 그 역사적 의 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형장의 김재규의 마 지 막 모 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