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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를 발생시켰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은 부마항쟁에 관한 강경진압을 주장하였 으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고 양인은 서로 경쟁적인 입장 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의 입장을 수용해 강경진압을 채택하자 차지철의 견제로 진퇴 위기에 몰린 김재규가 10월 26일 만찬 도중에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였다. 김재규는 군 후배인 차지철의 월권과 자신에 대한 무시, 그리고 그에 대한 대통령의 편애를 견딜 수 없었다. 그날도 박정희는 부마항쟁의 책임을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에 돌렸으며, 차지철도 중앙정보부의 무능함을 지적하였다. 10·26사태 직후 최규하(崔圭夏)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 하였으며 10월 말 군부 고위층은 유신헌법의 폐기를 결정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무너졌으며,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10·26 사건을 사전에 알지 못하였다고 주장했다. 10·26사태는 유신체제를 무너트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8년간 무소불위의 독재권력 을 행사하였던 박정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또한 김재규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하기는 하였지만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었으며 차지철과의 개인감정이 표출된 우발적인 범행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