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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고,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통일을 위해 김일성(金日成)을 만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정부는 이에 김영삼의 축출을 기도하 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대의원 2명이 전당대회 당시 투표권이 없음을 선언 하였고, 김영삼의 정적인 이철승계의 인물들이 전당대회 결과의 무효를 제소해 법원은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하였다. 국회는 더 나아가 김영삼의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지 회견 내용이 국가를 모독했다 는 이유로 10월 4일 그의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하였다. 결국 정부는 야당까지도 제도권 정치의 틀 밖으로 내모는 형국을 초래하였다. 그동안 쌓였던 국민의 불만이 김영삼 축출 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창원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유신체제의 종말을 초래하였던 부마항쟁으로서 이 지역은 김영삼 총재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10월 15일의 시위는 부산대학교의 학생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주동자 들이 연행됨으로써 확산되지 못하였으며, 본격적인 시위는 16일부터 이루어졌다. 16일 교내에서 집회를 가진 부산대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였고, 이에 동아대·고려신대, 고등 학생, 전문대생 등의 학생에다가 일반시민까지 가세하였다. 3,000여 명의 시위대는 게릴라식으로 경찰과 충돌하였고 자정에 이르도록 격렬한 시위 를 계속하였다. 17일에는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는 더 욱 확산되었다. 시민들의 호응 속에서 시위군중은 경찰서·파출소·세무서·동사무소·신문사· 방송국 등에 투석하였다.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16일부터 17일 이틀 동안 경찰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 파출소가 파손 또는 방화되었다. 18일 자정에는 부산시 일원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부대 등의 군병력이 투입되어 시위군중을 진압하였다. 18일에는 경남·마산 일원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경남대에 무기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오후 6시경부터 시작된 시위는 곧 2,000명의 시위군중을 이루어 공화당사를 공격하고 파출소·신문사·방송국·법원·검찰청·동사무소 등에 피해를 입혔다. 19일 밤에도 마산·창원 지역에 이러한 사태가 계속되자 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한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던 부마항쟁은 강경진압에 의 해 일단 해결되었으나 그 대응 방식을 둘러싼 집권층 내부의 갈등을 야기시켜 10·26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