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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철수라는 카드를 이용해 한국의 인권상황을 개선하려 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거부해 한·미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또한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핵무기 를 개발하려고 시도하면서 미국을 자극하였다. 이에 박동선(朴東宣) 사건까지 겹쳐 한·미관계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세력과 야당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1972년 유신체제 출범부터 긴급조치와 계엄, 재야인사의 구속 등이 계속되었으나 민주 화의 방향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특히 1978년과 1979년은 정치·경제적 모순이 정치적 위기로 연결된 시기였다. 1978년 동일방직사건과 함평고구마수매사건 등의 생존권 투쟁은 민주화 운동의 수준 을 급격히 고양시킨 사건이었다. 그 해 12월 12일의 제10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의 득표율을 올려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 31.7%를 앞지르게 되었는데 이는 민심의 이반(離反: 민심이 떠나서 배반함) 현상이 표출된 사례인 것이다. 이에 집권여당은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극단적인 강경 대응 이외에 여타의 대응 책을 찾지 못하였다. 1979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오원춘 사건은유신정권과 가톨릭세력의 정면충돌을 야기 시켰다. 1979년 8월의 YH사태는 이전의 노동소요가 절정에 이른 사건이었다. YH무역은 소규모 수출 업체로서 사장이 체불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였다. YH노조의 여공들은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당시 김영삼(金泳三) 총재하에서 유신정권에 대한 강경 투쟁을 전개하던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8월 11일 여공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당사내로 진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여공김경숙 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하였다. 이에 대해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 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사인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YH사태는 소규모의 비체제적인 노사갈등에 불과하였으나 정권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되 는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야당을 비롯한 전 민주화운 동세력과 유신정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김영삼은 유신철폐의 선명 한 기치를 내걸어 중도통합론을 표방한 이철승(李哲承)을 1979년 5월의 전당대회에서 누르고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등장하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