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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9) ★ 10·26사태[ 十,二六박정희 弑害 事態 ] 사무국 「 10,26 궁정동에서 한발의 총성이 무소불위의 독재정권18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부하였고 심복이었던 김재규중정부장은 유신의 심장부에 총알을 퍼부었 다. 탄압과 억압에 짓눌려 살아왔던 민중들은 민주주의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가 득하였지만 전두환보안사령관을 위시한 군부세력에 의해 제2의 군사쿠데타가 발생할 줄 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 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중앙정보부 안가 (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 載圭)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살해 한 사건이다. 십이륙사건·십이륙정변·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등으로 불린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는 몰락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18년간 권좌에 있으면서 1인 집권의 권위주의를 계속 강화하여 나아갔다. 특히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1972년 10월에 등장한 유신체제는 억압적인 비 민주적 정치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7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그동안의 정치·경제적 모순들이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상황이 악화되어 있었다. 중화학공업 화의 추진은 이 부문에로의 중복, 과잉 투자로 인한 효율성 상실과 소비재 품목 품귀라는 이중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는 곧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는데, 1979년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한국경제의 고성장 전략 추진과정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18.3%에 달하였다. 고도성장으로 1인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보상받으려 하였지만 독재와 인플레이션 등으 로 인해 민심은 체제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에 의한 고도성장 전략 은 노동자와 농민의 상대적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경제 위기의 심화 과정에서 이들 계층의 소외감도 점차 심화됨으로써 그들의 생존권 요구도 거세어졌다. 대외적으로는 1977년에 출범한 미국의 카터(Carter, J.)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