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page

- 29 - 세력들은 믿기 어려웠던 학살에 더 많은 관심과 부채감(서울역 회군)을 가진 것이라는 시 각이 있다. 이는 박정희는 죽었으되, 박정희만 죽었을 뿐, 박정희의 자리만 전두환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 시기적 상황의 역사적 관심편중에서 원인을 찾는 해석인데, 이 해석에 따르면 4.19 혁명은 이승만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고, 5.18은 충격적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6월 항쟁은 전두환의 항복을 받아낸 것에 비해 부마민주항쟁은 10.26의 계 기가 되어 유신정권 철폐의 철퇴를 가한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한 신군부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전남대 조정관 교수는 위에서 설명된 '객관적 조건' 이외에도, 항쟁을 기억하기 위한 ' 주체적 조건'을 5.18과 비교하며, 부마항쟁의 당사자들이 항쟁을 기억하기 위한 주체적 노력을 해나갈 수 없었던 상황이 존재했다는 시각을 제기했다. 첫째, 5.18의 경우 전두환 의 존재 때문에 계속 회자되었지만 부마항쟁은 유신세력의 소멸로 회자가 어려웠고, 지 역 내 민주화 세력이 부림사건 등의 여파로 타격을 입어 기억의 중심이 될 만한 동력을 갖지 못하였던 점[21], 짧은 항쟁 기간과 미숙한 조직력으로 항쟁의 주체와 이를 추구하 는 주체가 분명히 형성되지 못한 채, 80년대 이후 김영삼이라는 지역 정치인의 동원에 매몰되었다는 주장이다. 그 외 서강대 손호철 교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정치적 딜레마설도 있다. 이들은 부산- 경남 지역 베이스의 통일민주당이 1990년 3당 합당 이후 TK, 내지는 군부-권위주의 세 력과 한 배를 타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정치권에서 논의되지 않은 채로 잊혀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3당 합당 이후 구 군사정권에 대항했던 운동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찬양하기도 뭐한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이에 따라 부마항쟁을 자연히 무관심 속에 방치하는 혹은 묻어버리는 방향으로 갔다는 지적이다. 박정희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하는 정치 세력이 부산-경남 지역의 주류 집권 세력이 되면서 그를 부정하는 이 항쟁에 대해서 높이 평가할 수 없게 된 정치적 딜레마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그리 고 200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야 뒤늦게 재조명이 가속화된 것도 친노라는 3당합당 보수 정당과 관계가 없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