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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부마항쟁은 학생 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단순히 소수 명망가와 지식인적인 학생들의 참여를 넘어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거대 사건이었다. 이는 부마항쟁의 주 참여층이 하층 도시민, 이를테면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노동자, 구두닦이였고 수출지대의 노동자들의 참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이로써 답보 상태에 처해 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노동자와 시민 참여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운동이다. 이는 4.19 혁명에 이어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대규모 항쟁이었으며, 이러한 항쟁의 역사는 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에 비하면 대중적으로 언급되는 빈도가 의외로 낮은 편이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은 4.19 혁명 이후 다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연결되는 민주화 대장정의 큰 줄기를 맡고 있 는 항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세 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념 식도 가지고 영화나 드라마 등 기념사업도 많지만 부마항쟁에 대해선 다른 민주화 운동 에 비하여 정부의 관심이나 국가적 차원의 기념행사도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 문재인 정권 이후 2.28 민주운동 등과 함께 기념하는 편이지 2010년대 중반까지도 반쯤은 잊혀 진 역사였던 셈이다. 이는 4.19 혁명이 당시 김주열 열사에 대한 언론 보도로 전국적인 규모로 커진 데다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직접적으로 이끌어냈으므로 당연히 전 국민이 다 알았던 것과 달 리 부마항쟁은 정권의 언론 통제로 인해 그 당시나 직후에 부산, 마산 바깥에는 크게 알 려지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수도권에 본사를 둔 전국지 신문에는 그저 작은 소요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보도되었고, 서울이나 충청, 전라 등 부마에서 거리가 먼 지역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시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보통은 부산과 마산,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운동 정도로 알려졌고, 아예 모르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았다. 일부에서 광주민주항쟁을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것 은 문제라 여기지만 부마민주항쟁을 부마사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별 거리낌이 없 는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인에 대해서는 몇가 지 해석이 있다. 우선 부마민주항쟁 직후에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고 곧바로 다시금 전두환에 의한 군사독재의 철권 통치가 이어지는 동란의 과정속에 항쟁을 주목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부마항쟁이 일어난지 불과 7달 뒤에 광주에서 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 민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