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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에서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 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이라 적혀져 있었다. 그의 신원은 소지품으로 들고 온 도시락 속의 주민등록증으로 확인되었는데, 경찰은 그의 신원을 확인했음에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부검과 가매장을 실시했다. 가족들은 그를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던 차에 보름이 지난 11월 초에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반면, 해병대 내에서는 박구일 연대장 지휘하에 투입된 해병대 제7연대의 주민친화적 행적이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실제로 신동아에서는 해병대의 신사적 계엄임무 수행에 대해 당시 투입된 해병들과 시민들의 증언을 취재하여 보도하기도 했다. 신문에서는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 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황 총무뿐입니다. 위의 발언을 들은 후, 신민당 황낙주 총무를 만나 김재규가 전달한 말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책으로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 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 3백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라고 주장했지만, 차지 철 자신이 죽는 게 훨씬 더 빠른 해결책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1979.8.9.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 내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써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해 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매트리스 등의 안전장구가 있어야 하 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 부장의 강행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1979. 8월 중순경, YH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선교회 및 가톨릭 농민회의 등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청와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때 김재규 부장은 ‘긴급조치 9호는 칼날이 무딥니다. 아주 강한 10호를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10월 하순경, CPX기간 중 B-1방카에서 같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에도 김재규 부장은 ‘각하, 긴급 조치 10호를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하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 해 각하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정국수습이 되겠느냐, 당분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