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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이 중 부산에 있던 계엄사령관과 3공수 특전여단장, 전두환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은 소요 사태에 대한 빠르고 강경한 진압을 계획했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고 혹독했다고 한다. 아래는 진실 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에 기록된 실제 사례들이다. 해병대원 이○○(당시 이등병)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증언하길, "해병대는 돌 던 지는 시위학생에 맞서 1대 1로 따라가서 다방, 공중전화박스 등으로 도망가는 학생들을 잡아 무차별로 구타하였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학생들의 시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는 말을 당시에 계엄군으로 출동한 해병대 동기들로 부터 들었다. 당시 보호 장구라고는 철모밖에 없었던 해병대원들도 생존의 위협을 느껴서 갑작스럽게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것 이다.”라고 진술하였다. 하지만 해당 증언을 자세히 보면 이 증언은 당시 실제로 출동한 해병대 제 7연대가 아닌 제 2연대의 해병대원일 뿐만 아니라 증언 자체도 전해 들은 내 용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가내수공업자 김○○(당시 24세)은 퇴근 후 버스를 타기 위해 육교를 건너려고 하다가 계엄군이 육교통행을 제지하자 항의를 했고, 그 대가로 계엄군에게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 세 차례 폭행당한 뒤 군화발로 복부를 두세 차례 걷어차였고, 주먹으로 얼굴 을 구타당해 충격으로 실신까지 하였다. 깨어나고 나서도 다른 시민 7~8명과 원산폭격 을 당했고, 그 와중에 폭행당한 복부의 통증으로 계속 휘청거리자 군인이 엄살을 부린다 면서 욕설과 함께 군화발과 진압봉으로 구타하였다. 그러다가 낙하산 마크를 단 군인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