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page

- 18 - 일당 국회의원 3명의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자 민주공화당은 선별적 수리를 하겠다 는 발표를 한다. 중화학공업이 급속하게 성장하여 경공업 기반의 기업이 많았던 경상남도가 큰 피해를 받았으며 동시대에 터진 2차 오일쇼크까지 겹쳐 심각한 경기침체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 부에 대한 반발이 주요 원인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이는 사회전반에 상식으로 통한다. 그 러나(오일쇼크를 언급하는 측은 전적으로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로 간주하지만) 부산, 마 산지역이 경제적으로 심대한 피해를 받았다는 근거가 없으며 이에 대한 근거를 요약 하 면 다음과 같다 "1979년은 일반적으로 경제위기라고 인식하기보다는 호황의 정점에서 위 기로 진입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하며 호황의 정점에서 민중들이 직면하는 삶의 위기와 경제적 붕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국면에서의 경제위기는 다른 측면이 있음을 주지해 야 한다." 부산과 전국의 제조업 현실은 흔히 심대한 불황에 직면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낮음 을 보여준다. "1979년 부산 제조업의 총생산증가율은 전국상승률 보다는 낮지만 실질성 장률은 4%였다. 제조업 노동생산성 증가율의 경우 전국 평균은 –6.2%로 낮아졌지만 부 산은 오히려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다. 더군다나 부산실질임금상승률은 1979년 13.4%를 기록하고 있다. 전국 평균 12.6%보다 높았다. 부산 제조업체들의 연쇄부도와 실업률 증가로 빈민, 실업자, 노동자들의 고통이 가중되 었다고 간주하지만 정반대였다. 부산의 실업률 추이를 보면 1979년까지 부산 경제가 뚜 렷한 경제위기로 진입하거나 부산 노동자들의 조건이 악화된다는 어떤 징후도 발견할 수 없다.이 근거를 보여주는 것은 1970년 이래 부산의 실업률은 꾸준히 하락했다. 1972년 부산 실업률이 상승한 것을 제외하면 전국 실업률과의 격차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 다.1979년은 전국실업률과 부산실업률의 격차가 가장 크게 감소하는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