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page

- 180 - 미주 독립운동을 개인 돈으로……가난에 처했으나, 광복 후 대통령 추대마저도 뿌리쳐 3․1운동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선생의 독립 외교 및 선전활동은 거의 사비로 이 루어졌기 때문에 선생은 드디어 무일푼의 처지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다시 의학수업과 의료활동에 복귀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1942년 3월 1일 선생은 워싱턴에서 미주 및 하와이 동포들이 개최한 태 평양전쟁 전승기원 기념식에 참가하는 등 조국광복의 염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또한 선 생은 1942년 8, 9월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천세헌(’95건국훈장 독립 장 추서) 선생에게 보낸 서한 내용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선 젊은 한인들의 활동이 중요 하며 무엇보다 한인단결이 우선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한인대표를 통한 대미외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선생은 노령에다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원로로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복 후 선생은 미군정 사령관의 초빙으로 1947년 7월 83세 나이로 미군정 최고고문 으로 귀국하여 이듬해 9월까지 한국에서 머물렀다. 몇몇 인사들이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으로 인해 정치적 소용돌이 를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 결국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51년 1월 5일 87세의 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