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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이로 인해 경공업이 중심이 된 부산, 마산 지역의 많은 중소업체들은 이러한 타격의 직격탄을 받았다. 이렇듯 당시의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신설 등의 여파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경남지역 민심은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요인은 이후 시민들이 학생들 에게 호응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 결과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신민당을 포함한 무소 속이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을 앞서는 등 크게 약진했으며,이에 충격을 받은 민주공화당은 부가가치세 도입을 주도한 이들에 대한 책임론을 강하게 들고 나왔으며, 박정희 대통령 은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경질하는 개각을 단행하였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유신정우회의 백두진을 국회의장에 앉히면서 국회를 통제하려 하였다. 이런 와중에 1979년 5월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온건파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선출된다. 그리고 강경 대여노선을 취하며 과감하게 청와대 투쟁을 하게 된다. 이때 YH사건이 일어나고 신민당은 당사를 노동자들에게 내주었는데, 박정희와 여권은 40 시간 이상 당사를 내준 것에 대해 김영삼을 배 후로 의심하였다. 어쨌든 결말은 공권력을 투 입해 진압하는 과정이 벌어져, 당사에 경찰이 들어가 야당 의원 등과 실랑이를 벌이며 진압 작전을 벌이던 중 당시 21세 여공 김경숙 양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와중 신민당에서는 내분이 발생해 유가 준 윤완중,조일환 등 신민당 원외 지구당위원 장 3명은 5월 전당대회에서의 대의원 몇 명의 자격을 문제삼아 서울지방법원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 했고, 전당대회 의장이던 정운갑이 총재권한대행이 되었다. 그 리고 그해 9월12일 김영삼은 뉴욕타임즈지와 인터뷰에서 김영삼 의원은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줄 것이며 이를 위해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고, 이에 발끈 한 여권은 국회의원으로서 품위를 잃은 사대주의적인 망동이라며 김영삼의원직제명파동 을 일으키게 되고, 야당이 항의의 표시로 10월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 민주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