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page

- 178 - “한국이 일본에 대해 전쟁 개시하면 미국이 지원해달라.” 미국 대통령 당선자 하딩에게 요구 1919년 9월 이승만은 통합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를 발족시켜 구미에서의 정부행정을 대행하게 하면서 외교업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리 하여 대한민국 통신부도 여기에 흡수 통합됨에 따라 선생은 처음에는 구미위원부의 부위 원장, 그리고 1920년 6월 초대 위원장(金奎植) 사임 이후에는 위원장으로 대미외교의 중 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1921년 1월 선생은 오하이오주 메리온시에서 미국 대통령 당선자 하딩과 회견하 고, ‘한중 양국이 대일(對日) 개전을 하면 미국은 이를 후원할 것’을 요청하면서 한국 독 립에 미국이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런 직후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태평양지역에 이해 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군비축소 문제와 극동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국제회의를 11월 11일 워싱턴에서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임시정부에서는 이 태평양회의(혹은 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문 제를 상정시켜 파리평화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독립의 목적을 다시 한 번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 이승만을 전권대사, 선생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 대 표단을 구성하여 적극적인 독립 외교활동을 벌이게 하였다. 이에 선생은 미 국무장관 휴 즈를 방문하여 일본이 한국 독립운동자를 학대 학살하는 진상을 폭로하고, 태평양회의에 서 미국이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여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12월 28 일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국내 13도 260군 대표 및 각 사회단체 대표 370여 명이 서명 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와 아울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 립요구서를 정식으로 접수시켰다. 선생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의 이러한 독립 외교활동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민족의 독립열망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각국 대표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