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page

- 176 - 다시 미국에 도착한 선생은 곧바로 미 육군성의 임명을 받아 외과의사로서 미․스페인 전쟁에 종군하였다. 그리고 1898년 12월 전쟁이 끝나자 펜실베이니아에 개인병원을 개업 하고, 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다시 조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투신하게 된다. 국내의 거족적인 3․1운동 소식을 접한 재미 한 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대표회의’를 개최하 였다. 이 회의에서 재미동포들은 끝까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참여할 것을 다짐 하는 12개 항의 결의안과 3개 항의 실천사항을 채택하였다. 그 결의안 가운데 하나는 ‘서재필을 외교고문으로 임명하여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 를 설치할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가산을 정리하여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한 후 한국의 독립 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와 선전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대한민국은 독립국가임을 인정하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열다 그 같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미주에서의 한국 독립선언식을 계획 추진하였다. 그리하 여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간 선생의 주도로 필라델피아의 한 극장에서 150여 명의 재미 한인대표, 미 상원의원과 시장 등 다수의 미국인 후원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 : 일명 제1차 한인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선생과 이승만(李承晩)을 비롯한 재미 한인대표들은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면서 1919년 4 월 13일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 다. 한인자유대회 결의안 1.재미 한인은 중국상하이에 건설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며 후원하기로 결의한다. 2.구미 각국에 대한민국 외교사무부를 설치하기로 한다. 3.구미 각국 민중으로 하여금 우리 독립선언의 주장과 국내외 사정을 이해하게 하는데 노력하기로 한다. 4.일본 정객에게 충고문을 보내어 일본의 실책을 각오하게 한다. 5.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기로 한다. 그리고 대회의 마지막 행사로 참석한 모두는 태극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시내를 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