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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 - 모교인 조지 워싱턴대학에 출강하게 되었다. 그 후 워싱턴에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1895 년 6월 미국 여인 뮤리얼 암스트롱(M. S. Armstrong) 양과 결혼하여 가정적인 면에서 나 재정적인 면에서 안정을 찾게 된다. ▲서재필의 컬럼비아 의대(현 조지워싱턴대 의과대학) 졸업 사진. ( 맨 윗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서재필.) “한글로 민중을 계몽하자.”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 대중신문, <독립신문>을 창간 이즈음 국내에서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 수구정권이 무너 지고 새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세워졌다. (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갑오개혁(甲午改革) 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리고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서광범 등 이 귀국하여 복권되었다. 특히 1895년 5월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성립되자 이 내각의 실세였던 내무대신 박영효는 개화당 동지인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 용하였다. 하지만 당시 선생은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다. 그 후 1895년 7월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하여 재차 귀국 을 권유하자, 선생은 같은 해 12월 26일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그리던 조국 땅 을 다시 밟았다. 1896년 1월 귀국 직후 갑오개혁에 의해 입법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中樞院) 고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