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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 - 또한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여 당초 기대와는 달리 이들을 냉대하였다. 이 같은 태도변화는 교활한 일본인들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친청(親淸) 수구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개화파를 지원하더니, 이제 한국 정부와의 관계개 선에 이들이 걸림돌이 되니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1885년 4월 박영효․서 광범과 함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실패한 혁명의 여파로 부모 형제 처자식 모두 잃 고, 미국으로 단신 망명 낯선 이국 땅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선생은 ‘내 생활은 내 힘과 내 손으로 개척하리라’는 결 심을 가지고 1년여 동안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우는 고 단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886년 9월 미국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 나 펜실베니아 주 윌크스베어 시로 이주한 뒤, 이곳에 있는 해리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하 여 본격적으로 역사․철학․과학 등 서구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서구 학문과의 만남은 선생으로 하여금 일본식 문명 개화론을 극복하면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적 사고 를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미국생활에 좀 더 적응하기 위해서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에 입적하게 된다. 이 같은 결정에는 ‘대역부도’의 죄인이었기 때문에 다시는 귀국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 이 결정적인 동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와 아울러 정변 참여로 말미암아 부모와 형, 부인은 음독자살하고, 친동생 재창(載昌)은 참형 당했으며, 아들(2세)은 굶어 죽은 가 족참변 또한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던 것 같다. 1889년 6월 해리힐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이어 라파예트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 나 학비 문제로 2년 만에 중도 퇴학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은 우선 학자금을 마련한 뒤 공부를 계속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1890년 펜실베니아주에서 워싱턴으로 이주하여 미 육군 군의(軍醫) 총감부 도서관의 번역원으로 취업하였다. 여기에 근무하면서 1891년 콜럼비아 의과대학 야간부(현 조지 워싱턴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세균학을 전공하였 다. 그리고 주경야독으로 1894년 6월 동 대학을 졸업하고 가필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서재필이청년시절 일본에서 촬영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