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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 - 그러다가 인근 대덕군에 살던 근친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선생은 일곱 살 무렵 서울로 보내져 양모 안동 김씨의 동생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 서 과거를 대비하여 한학을 수학하였다. 김성근은 1862년 문과에 급제한 뒤 당시 판서 직에 있었으며, 그의 집에는 개화파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이 일가로서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그 집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15세 연상인 김옥균과 자연 스럽게 접촉하게 되었고, 또 그를 통하여 박영효(朴泳孝)와도 알게 되었다. 이들과 함께 초기 개화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서광범(徐光範)은 그의 5촌 당숙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김성근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초기 개화파의 핵심인물들과 알게 되어 그들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1882년 3월 선생이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서적발간을 담당하는 교서관(校 書館)의 부정자(副正字)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들과 빈번한 접촉을 통하여 개화사상을 심화시켜 갔다. 그리하여 문과에 급제한 양반 관료임에도 불구하고 1883년 김옥균의 권 유로 일본 동경의 호산(戶山)육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에서 선생은 14명의 한국청 년들과 함께 1년여 동안 근대식 군사교육과 지리학 등 신학문을 익혔다. 비록 짧은 기간 의 일본 유학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개화와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나이 스물 한 살에 갑신정변 일으켜. 수구파 제거에 나섰으나… 1884년 7월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뒤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하였다. 고종도 이를 승낙하여 선생은 조련국(操鍊局) 사관장(士官長)에 임명되었으 나, 일본세력의 침투를 우려한 청나라와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수구정책으로 회귀한 친청 정권의 반대로 사관학교 설립이 지지부진하게 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급진적인 개화와 개혁을 꿈꾸게 되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1884년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서광 범․홍영식(洪英植)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거사에 돌입한 정변에서 선생은 청년 사관생도들을 지휘하여 고종 을 호위하고, 수구파 인사들을 제거하는 일을 맡았다. 개화당 정부는 서정쇄신과 근대적 사회개혁 이념을 담은 14개조 개혁강령을 반포하였 지만, 청나라의 무력개입으로 3일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병조참판 겸 정령관 (正領官)에 임명되어 군사분야의 개혁과 근대화 책임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변 의 실패로 말미암아 후일을 기약하면서 1884년 12월 11 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 께 상선 천세환(千歲丸)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죄인으로서 정변 주모자의 인도를 집요하게 요구하였고, 일본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