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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8) ◈釜馬民主抗爭 ( Busan–Masan Democratic Protests) 1979년 10월16일부터 10월2일까지 부산직할시와 경남 마산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 주화운동이었다. 197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로 학생 운동, 시민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으며, 이를 누르기 위해 학생 운동 을 탄압했고, 당시 미국은 지미카터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절이라 박정희 정부의 정치탄압으로 인한 인권 문제를 심히 비판, 압박을 하던 상황이라 한미관계는 최악이던 시절이었다. 1차 오일쇼크로 물가상승률이 크게 늘어나면서 한국도 경제위기에 봉착했지만 이를 중동에서의 대규모 건설사업 수주로 매년 수십억 달러의 외화가 한국으로 흘러들어오고 수출증가율이 급속히 불어나 다시 고도성장으로 복귀하고, 중화학 공업에 대한 진흥정책 을 펴면서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가 급속히 불어났다. 하지만 중동붐으로 몇 년간은 급속한 성장을 기록할 수 있지만 투자조정에 실패하면서 중화학공업이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중소기업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되었 고 또한 이러한 호황에도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두 자릿수대를 기록하고 부동산값은 급속 히 상승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책을 여러 번 내놓아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고 그 동안 영업세·물품세·직물류세·유흥음식세 등 복잡한 세목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1977년 7월에 시행하기 시작한 부가가치세는 소상공인과 서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978년에 건설주 파동으로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경제에 다시금 먹구름 이 끼기 시작했고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2차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물가상승률은 2년만에 10.1%에서 18.3%로 오르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