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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 - 임경업장군[林慶業 將軍] 비운의 명장 임경업장군 조선 후기의 명장이자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장군 임경업(1594~1646)은 광해군 10년(1618)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당시 친명반청 (親明反淸)의 사회 분위기와 함께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자 무장으로 평가받았다. 심 기원(沈器遠, 1587~1644)의 모반 사건과 관련되어 인조 24년(1646)에 친국(親鞫)을 받 던 중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의 명을 받은 형리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임경업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우며 반청을 표명하여 민중의 절대적인 지 지를 받았던 명망 있는 장군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대내외적 정세에 밝지 못하여 결국 옥사(獄死)하고만 불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임경업의 불행은 궁극적으로 당시 조 선의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것이지 결코 개인의 능력 탓은 아니었다. 그는 쇠퇴한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치를 씻으 려 했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이 이를 지지해 줄 수 없었다. 이러한 민중의 판단은 그를 무능하고 실패한 장군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기에 이 른다. 그는 충의, 지조, 용기의 상징으로 민중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죽음 이후 임경 업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의 창작과 대중적 수용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비전승에 나타난 임경업 장군의 일대기는 더욱 영웅적이다. ‘영웅의 일생’ 서사구조 에 따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부모가 명당을 얻어 태어나다 2. 원조자의 도움으로 수련하다 3. 신이한 행적을 행하다 4. 사후 어업신(漁業神)이 되다 그런데 임경업은 출생에서부터 이미 금기를 위반한 것으로 묘사된다. 즉 임경업의 부 모는 명당을 잡아준 중이 제시한 금기를 어긴다. ‘자손 둘 자리를 잡았으니 올라가 보지 말라’는 것과 ‘큰 바위를 건드리지 말라’는 두 가지이다. 이처럼 금기를 깨뜨리는 것은 임경업이 출생에서부터 결핍을 내포한 인물임을 밝히고, 그가 결국은 비참한 죽음을 맞 이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민중이 수용한 현상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