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page

- 137 - (對馬國)에 다다른 경로로 보아 구야한국이 지금의 김해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관가야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 (地理志)에 따르면, 김해소경(金海小京)조에 “제10대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신라에 항 복했으므로 그 땅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금관가야는 본래 구야(狗 邪)·가락(駕洛: 伽落)·가야라고 불렸던 것으로, 뒤에 6가야의 하나로 ‘금관가야’라 이름 지 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유사』에는「가락국기(駕洛國記)」가 인용되어 있어서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탄생설 화와 왕력(王曆)이 실려 있다. 즉 김해지역의 9간(九干)이 구지봉(龜旨峰)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을 수습하여 집에 가져오니 모두 사람이 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수로 왕으로 ‘가락국’을 세웠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모두 돌아가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이 는 금관가야가 초기에 6가야의 맹주국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에 자리잡아 농업이 발달하고, 또 남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어 낙동강과 아울러 수운의 편리함을 이용해 경제적·문화적 발전에 유리 하였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여러 가야의 맹주국이 되어 대가야라고 불렸던 것이다. 「가락국기」에는 제2대 거등왕(居登王)부터 제10대 구형왕(仇衡王)까지 역대 임금의 이 름이 열거되어 있으나, 그 밖에 금관가야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삼국사 기』신라본기에 따르면, 532년(법흥왕 19)에 마지막 왕인 구해(仇亥)는 신라에 나라를 바 친 뒤 높은 벼슬을 받고,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한다. 후에 아들 무력(武力)은 신라와 백제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뒤에 신주도(新州 道) 행군총관(行軍摠官)이 되었다. 무력은 이러한 공로로 각간의 자리까지 올랐는데, 이 사람이 바로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다. 금관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멸망되었는데, 멸망 연대는『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사에 따르면 532년보다 약간 앞선 때인 듯하다. 532년금관가야가 신라에 편입된 후 김유신 일가를 위시한 금관가야계 유민들이 기존의 김씨성을 지닌 진골귀족(眞骨貴族)과의 구별을 위하여 신김씨(新金氏)를 칭하였다. 이 신 김씨를 칭한 인물로는 신라 하대(下代) 고승 진경대사(眞鏡大師)심희(審希)가 대표적이다. 성덕왕(聖德王)대, 혜공왕(惠恭王)대를 거치며 금관가야계 후손들은 그 위상이 매우 약화 되었고, 이에 9세기 후반에 김씨 칭성(稱姓)을 규제당하면서 신김씨(新金氏)를 칭하게 되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