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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 - 그런데 이 돌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설이 제기 되 어 왔다. 먼저 이것을 석탑이라고 보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의 유구가 안동과 의성지방 에 분포되어 있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왕릉이라고 하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권31, 산음현(山陰 縣) 산천조(山川條)에 “왕산(王山)”이 있고 그 각주(脚註)에 “현(縣)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 다. 여기서 이 구형왕릉이라고 왕명(王名)을 붙인 기록은 홍의영(洪儀永, 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비로소 보이고 있다. 여기서 이 돌무덤에 대해 설명하고 근처에 있는 왕산사(王山寺)에 전해져 오고 있는 『산사기권(山寺記卷)』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산청현읍지(山淸縣 邑誌)』에 의하면 정조 22 년(1798)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 서 홍의영의 『왕산심릉기』도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왕산사는 없어지고, 다만 이 무덤을 위한 재실(齋室)이 있어 여기에 있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목궤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옷, 그리고 활과 칼 등의 유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구형왕의 후손들이 1793년 덕양전(德讓殿)을 세워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추모 제를 지내고 있다. [금관가야] 금관가야(金官加耶)는 6가야(六加耶)의 하나로, 서기 전후부터 532년까지 경상남도 김 해를 중심으로 존속했다. 금관가야라는 이름은『삼국유사(三國遺事)』오가야조(五伽耶條)에 인용된『본조사략(本朝史略)』을 통해 알려졌다. 가락국(伽落國: 駕洛國)이라고도 했으며, 초기에는 여러 가야 중 맹주국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大加耶) 또는 본가야(本加 耶)라고도 불렀다. 또 지리적으로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가야(南加耶)라고도 하였다. 3세기 후엽에 쓰여진『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는 구야국 (狗邪國)이라고 했으며, 왜인조(倭人條)에는 구야한국(狗邪韓國)이라고 하였다. ‘구야(狗 邪)’는 가야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왜인조에는 위(魏)나라의 사신이 대방군(帶方郡)을 떠나 왜국에 이르는 항로를 기록했 는데, 한반도의 서해안을 남하해 남해안의 구야한국에 이르고, 다시 바다를 건너 대마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