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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 -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孝恭王, 재 위 897~912)이 즉위한 뒤, 최치원은 관직 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 에 머물렀다.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 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 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 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 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경주의 남산(南 山),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淸凉寺), 하동 의 쌍계사(雙磎寺)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 로 전해지며, 부산의 해운대(海雲臺)라는 지명도 최치원의 자(字)인 ‘해운(海雲)’에 서 비롯되었다. 유(儒)·불(佛)·선(仙) 통합 사상 최치원은 개혁이 좌절된 뒤에 신라 말 기의 혼란 속에서 은둔 생활로 삶을 마쳤 다. 하지만 유교(儒敎) 정치이념을 기반으 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최언위(崔彦撝), 최승로(崔承老) 등은 고려 에서 유교 정치이념이 확립되는 데 기여 했으며, 새로운 국가체제와 사회질서를 형 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최치 원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태인(泰仁) 무성 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 岳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祭 享)되는 등 유학자들에게 계속해서 숭앙되 었다.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 역사를 정리하여 삼국의 역사를 연표의 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치원은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고유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아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 을 하나로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 는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난 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서 유교와 도 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풍류도’ 를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제시하 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 라 한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 그 가르침 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 려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 包含三敎 接化群生). 들어와 집에서 효도 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 의 가르침이다(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 國 魯司寇之旨也).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 이다(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 也).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 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諸 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진흥왕 조(條)’ 에 인용되어 전해지는 이 글에서 최치원 이 말하는 풍류도는 신라의 화랑도를 가 리킨다. 달리 풍월도(風月道)라고도 하는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 때에 비로소 제도 로 정착되었지만, 그 기원은 고대의 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