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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 - 지금의 江蘇省 南京市) 현위(縣尉)로 관직 에 올랐으며, 이 무렵 1부(部)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저술하였다. 당시 당(唐)은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각 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875년부터는 왕선지(王仙芝), 황소(黃巢) 등이 유민을 모아 산둥성[山東省], 허난성[河南省], 안 후이성[安徽省]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877년 겨울 관직에서 물러난 최 치원은 양양(襄陽)에서 이위(李蔚)의 문객 (門客)이 되었다가, 회남절도사(淮南節度 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 巡官)이 되었다. 그리고 고변이 황소(黃巢) 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 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자, 그의 종사 관으로 참전하여 4년 동안 표(表)·서계(書 啓)·격문(檄文) 등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 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名文)으로 이름 이 높았다. 최치원은 879년 승무랑(承務 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 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의 직위에 올랐으 며,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받았 다. 그리고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 를 받았다. 최치원(崔致遠)은 당 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羅隱, 833~ 909)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문명 (文名)을 떨쳤다. <당서(唐書)> ‘예문지(藝 文志)’에도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 (桂苑筆耕)> 등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 기 록되어 있다. 885년(헌강왕 11년), 최치원은 당 희종 (僖宗, 재위 873~888)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했으며, 신라의 49대 헌강왕 (憲康王, 재위 875~886)은 그를 당에 보 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 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으로 등용하였다. 귀국한 이듬해에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 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을 썼고, 당 나라 에서 썼던 글들을 28권의 문집으로 정리 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 가운데 <중산복궤 집(中山覆簣集)> 등 8권은 전해지지 않으 며,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만 전해지 고 있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외 직(外職)으로 물러나 태산군(太山郡, 지금 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 청남도 서산)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893 년에는 견당사(遣唐使)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떠나지 못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에서 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었 으며, 중앙 정부는 주(州)와 군(郡)에서 공 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심각한 재 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889년에 는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이 공부(貢賦)의 납부를 독촉하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의 힘은 수도인 서라 벌 부근에만 한정될 정도로 정치적 위기 가 심화되었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 에게 10여 조의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 였고, 진성여왕은 그를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임명 하였다. 하지만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 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