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page

- 118 - 그 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다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자리에 들어오게 되 어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석조전은 6·25전쟁 중에 내부가 불탔다. 이후 덕수궁은 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 되었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었다. 덕수궁은 당초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가(私家)이던 것을 선조 때 임시로 왕이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이 된 것인 만큼, 궁이 자리잡은 위치나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조선시대 의 다른 궁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 위치는 한성부(漢城府)의 서부 황화방(皇華坊)과 정릉동(貞陵洞)일대로 이곳은 원래 태 조의 계비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능은 태종 때 옮겨지고 그 자 리에 월산대군의 집이 지어졌던 것이다. 이곳은 도성 내의 주요 가로와도 직접 면하여 있지 않은 곳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은 궁이 있는 곳으로는 여겨지지 않던 것으로 보 인다. 덕수궁은 결국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 습을 갖추었으며, 건물의 배치도 이때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의 상태에서 그 위치를 알아보면, 궁의 서쪽은 미국대사관 남쪽 길을 따라 러시아공 관이 있던 언덕 일대와 신문로 일대에 해당되고, 북쪽은 영국대사관을 거쳐 성공회(聖公 會) 앞길을 따라 덕수초등학교 담 위쪽을 지나 신문로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이 자 리에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로 영국, 미국, 러시아의 공관 터를 내주면서 궁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서양식 건물이 지어지고 도로가 생기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정전과 침전(寢殿)이 있는 부분, 선원전 (璿源殿)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重眀殿)이 있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 남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 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