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page

- 107 - 한 인물들은 지금까지의 통설대로 조선 낭인만이 아니라 일본군인 장교가 직접 개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일본의 우익 민간인들이 자행했다 고 강변하고 있고, 또 이들이 이른바 한국 합병 후에 자신들의 공로를 과시하기 위 해 저마다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을 너무 여과 없이 받아 들이는 문제점도 있다. 또 하나, 친일 정권 부활을 위한 궁중 쿠데타가 중요 과제였고, 이 과제를 수행 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조선 왕실, 특 히 고종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는 방식으 로 명성황후 시해라는 극단적인 수단이 채택되었다고 보이는데, 이러한 점에 대해 서는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 어져야 할 것이다. 또, 명성황후 시해 사 건에 관여한 인물 중에 후쿠자와의 영향 을 입었던 국권파의 한 그룹인 '게이오(慶 應) 출신' 우익의 움직임이 시해 사건 1년 전에 발생한 김옥균의 암살 사건과 묘하 게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 할 만한 가치가 있다.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 이라고도 불리었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 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 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 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 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 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 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