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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가운데 하나로, 1658년(효종 9)에 설치됐다. 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 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어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이른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했 다. 이미 병인양요 때 광성보에 근무한 바 있던 魚在淵이 포격을 피할 안전한 장 소에 군사들을 숨겼다가 상륙하는 美軍에 맞서 싸웠다. 朝鮮軍은 물러서지 않고 奮戰(분전)했으나 무기의 劣勢(열세)를 극복하지 못하 고 패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미군은 광성보 전투 후 소득 없이 물러갔 다. 미군의 처지에서 볼 때 辛未洋擾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한 사건 이었다. 廣城堡 안에는 광성돈대,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忠節을 기리는 쌍충비각, 이름을 알수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다. 강화역사유적을 돌아보고 유족들과 참여자들은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군관민의 피와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시우 역사학자의 근현대사의 解說은 어느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반적인 상황보다 훨씬 깊고 넓은 설명이었 습니다. 뜻깊은 강화역사탐방과 민간인학살지 參拜를 모두 마친 참여자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늘 하루 年老한 몸을 이끌고 한사람의 落伍(낙오)없이 目的地 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주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