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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밤 11시를 前後한 時點부터 김대중·김종필(金鍾泌)이 連行되는 등 權力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이러한 배경 아래 5 월 18일부터 시작되었다. 5,18민주항쟁이 김대중의 背後操縱이나 人民軍介入設등 터무니없는 陰謀論과 計劃的 인 武裝蜂起에 의해 觸發되었다는 流言蜚語도 있지만 外部의 指示나 조종에 의해 이루 어졌다고 보기에는 그 發端이 自然發生的이었다. 신군부를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이 국민을 抑壓하려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광주에서의 공수부대 중심의 武力鎭壓이 학생과 시민의 憤怒를 誘發하였고 鎭壓의 强度가 높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무력저항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학생시위 에서 시민봉기로 다시 무력항쟁으로 上乘되었다. 5월 13일 서울에서의 가두진출에 자극을 받은 광주의 대학생들은 14일과 15일 街頭에 進出하였고, 5월 16일 다른 지역에서는 小康局面에 접어들었으나 광주에서는 夜間에 횃 불시위가 敢行되었다. 5월 18일 0시 5분경 정동년(鄭東年) 등 광주지역의 復籍生과 총학생회 간부들이 예비 검속되었으며,1시경 광주 일원에 공수부대가 投入되고 각 대학에 계엄군이 진주하였다. 이런 背景에서 決行된 5월 18일의 학생시위는 抵抗의 發端이었다. 休校令이 내려질 경우 전남대학 校門 앞에서 集結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隊員들은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였으며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하였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 후 1시부터 無差別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負傷者가 續出하였다.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 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過剩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團結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학생 連 帶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시민들이 군·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 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