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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박정희 정부의 維新體制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1979년에 限界에 이르렀다. ‘백두진(白斗鎭)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반정부 인사 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强壓策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野黨과 在野세력의 抵抗 이 高潮되어 維新 정국은 내리막길을 걷고있었다. 代表的으로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 ‘오원춘사건(吳元春事件)’에 이어 ‘YH무역노조 신민당사 籠城’이 일어났고, 잇따라 김영 삼(金泳三)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停止 假處分과 의원직 剝奪로 政局은 葛藤으로 치달았다. 이에 釜馬抗爭이 1979년 10월 부산대학교를 중심으로 유신독재를 반대한사건이 정국 을 불안하게만들었고있었다. 이어서 維新獨裁撤廢운동은 인근 馬山지역까지 들고일어나 사태는 수습할수없는상태까 지 되었다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 치 않게 확대되어나가자 强硬策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18일 0시를 기해 포고문 제1호를 발표, 각 대학의 당분간 休校조처와 夜間通行禁止시간의 2시간 延長 등 8개항을 布告하였다. 戒嚴司令部는 10월 24일 군·검합동반을 편성, 계엄시기 중 조직깡패를 拔本키로 特別 수사부를 설치, 掃蕩작전에 들어가 132명을 검거하고 23명을 구속 처리하였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였다. 이와 함께 마산 지역 작전사령부는 마산일원에 軍을 駐屯시켜 市廳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등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에 들 어갔다. 통행금지가 2시간 연장되었고, 경남대학과 경남산업전문대학은 無期限 휴교조처 가 취해졌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 도 높은 진압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되어 10·26사 건이 발발하였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直擊彈이 維新의 心臟部를 꿰뚫었다. 군사유신독재정권이 19년동안 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하다 終止符는 歷史가 證明하듯 이 悽慘하게 막을 내리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