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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籠城을 解散한 경찰은 살인과 폭력에 대해 사과하는 대신 YH 무역 노조를 解散시키 고, 노동자들을 도왔다는 이유를 들어 성직자를 포함하여 기독교 인사 8명을 구속하였다. 또한 당사를 짓밟힌 야당의 강경한 항의에 대해, 야당 대표의 국회 의원직을 박탈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국회 의원 선거에서 여당(공화당)의 득표율 변화 總選이 치러질 때마다 점점 得票率이 낮아진 共和黨은 1978년 선거에서 제1야당인 新 民黨보다 1.1% 낮은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維新 末期의 어려워진 경제 상황과 계속된 獨裁 정치에 대한 국민의 反撥을 보여 준다. 유신 체제의 野蠻적 暴力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 주었고, 民主化를 이루 려는 운동이 다시 불타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 운동 彈壓에 반대하는 학생, 노동자, 종교계의 투쟁이 이어졌고, 야당 탄압에 항의하는 국민 여론도 擴散되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 지역의 대학생 7,000여 명이 "독재 타도, 유신 철폐"를 주장 하며 시위에 나섰다. 시위는 18일에 마산과 창원으로, 24일에 대구로 확산되었다. 유신 정권은 釜山과 馬山에 군대를 投入하여 시위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대규모 시위를 진압 하기는 쉽지 않았다.(부·마 민주 항쟁) 10월 26일 저녁, 박정희가 死亡하였다.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총으로 쏜 것이다. 18 년간 최고의 권력을 누려 온 박정희는 이렇게 悲劇的인 最後를 맞았다.(10·26 사건) 이로 써 유신 체제도 終末을 향해 치달았다. 봄이 왔으나 봄이 아니다 維新에 맞서 싸웠던 이들은 獨裁者가 사라졌으니, 이제 민주주의가 實現될 것이라 믿 었다. 그러나 유신 체제를 繼承하여 군사 독재를 연장하려는 세력이 남아 있었다. 바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新軍部 세력이었다. 1980년 봄,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새 希望으로 부풀었다. 구속되었던 良心囚들이 풀려났고, 정치 활동 制限도 사라졌다. 維新 政權 아래 쫓겨났던 교수와 학생 들도 복귀하였다. 박정희가 총애한 군부조직 하나회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다 그러나 어떻게 새 憲法을 만들고, 새 政府를 구성할 것인지가 不透明하였다. 전두환 등 新軍部 세력이 軍事 叛亂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고(12·12 군사 반란,1979) 이어서 정치 권력을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