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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조직을 만들었다.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이 解職되고, 야당 대표를 선출하는 행사장이 정치 깡패들에 의해 난장판이 된 것도 이때였다 勞動者들이 노동 組合을 만들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는 不穩하게 여겼으며, 鬪爭하는 勞動者와 이를 돕는 知識人을 경제 건설을 가로막는 적, 북한 사상에 물든 빨 갱이로 몰아세웠다. 維新 체제 7년은 대다수 국민에겐 꽁꽁 얼어붙은 겨울공화국이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소망하다 維新 體制 아래서 민주주의를 말하기 위해서는 큰 고통을 勘收해야만 했다. 그러나 철 저한 감시와 暴力에도 抵抗은 이어졌고, 민주화 운동도 그만큼 발전하였다. 겨울 공화국 을 앞장서서 돌파한 것도, 가장 苛酷한 彈壓을 받은 것도 學生들이었다. 10월 유신 1주 년을 맞은 1973년, 대학생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 등을 주장하며 시위에 나섰다. 이후 維新이 끝날 때까지, 학생들은 격렬하게 維新 反對 운동을 벌였다. 暴力적인 維新 體制는 양심적인 종교인과 언론인, 문인, 정당인 등으로 이루어진 이른 바 '在野'라는 鬪爭적인 시민 사회를 만들어 냈다. 이들 在野 인사들은 '민주 회복 국민 회의'와 같은 연합 단체를 조직하여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국민 운동을 벌였다. 동일 방직이나 YH 무역처럼, 많은 노동자들이 민주적인 노동 조합을 건설하여 노동자 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咸平 고구마 사건 등 경제 성장 과정에서 농민을 희생시 킨 정부의 정책에 맞선 농민들의 투쟁도 이어졌다. 維新 정권은 노동자나 농민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보다 그들의 입을 틀어막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러나 學生과 在野 인사 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지지하였으며, 아예 이들과 생활하면서 함께 싸우는 이들도 생겼다. 민주화 운동이 差別받는 民衆의 권리 찾기 운동과 結合되면서, 민주주의는 사회·경제 적 평등을 포함하는 말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小數의 학생이 나 지식인만이 아니라 많은 階層이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도 자라났다. 차별받는 이들, 그 래서 민주화의 主體가 될 階層이란 뜻의 民衆이란 말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YH 女工, 維新을 무너뜨리다 1979년 8월 11일 깊은 밤, 1,000여 명의 경찰이 제1야당이던 新民黨 본부 건물로 밀 고 들어갔다. 절규하면서 버티던 여성들은 모두 끌려 나왔고, 안타깝게도 한 여성이 死亡 하였다. 이들은 YH 貿易이라는 회사의 노동자들로, 신민당사에서 籠城하며 회사의 부당 한 조치와 경찰의 간섭에 맞서 싸우던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