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page

- 42 - 이어 중국과 일본도 國交를 맺었다. 북한도 남북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 섰다. 미국, 일본과 同盟하여 반공 정책을 펼치던 한국 정부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 었다. 많은 국민이 박정희의 장기 執權에 反對하는 상황도 남북 대화를 추진하게 만들었다. 1969년에 박정희는 국민의 거센 반발을 억누르고 헌법을 改正하여 세 번째 대통령에 출 마하였다. 1971년에 격렬하게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였 다. 그러나 곧이어 치러진 국회 의원 선거 결과는 박정희가 이끄는 共和黨은 국민의 支 持를 받지 못했다. 국제적인 和解 분위기가 擴散되는 가운데 국민의 反撥에 부딪힌 박정희는 한편에서는 북한의 南侵 위협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남북 對話를 추진하는 矛盾된 對北 정책 을 이용하여 권력을 강화하였다. 1971년,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북괴의 남침이 걱정 되는 상황'이라며 국가를 전시 체제로 운영하겠다고 나섰다.(1971. 12. 비상 사태 선언) 그러고는 秘密裡에 북한과 평화 협상을 추진하여 다음해인 1972년 7월에 남북의 평화 통일을 약속한 7·4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공동 성명 발표 석 달 뒤, 박정희는 국회를 解散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禁止하였 다.(1972. 10월 維新) 이어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헌법, 강력해진 대통령이 필요하다며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새 헌법(維新 憲法)을 제정하였다. 1972년 12월 박정희가 네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유신 체제가 시작되었다. 永久 總統制가 되고말았다. 維新 체제가 성립되면서 남북 대화도 사실상 끝났다. 和解와 統一을 말하면 빨갱이가 되고 민주주의가 짓밟혔고, 統一을 바라던 국민의 熱望도 물거품이되었다. 維新 체제 - 폭력의 제도화 維新 憲法에 따라 대통령은 法官을 임명하고, 국회 의원 후보 1/3을(유신정우회) 推薦 하였으며, 법의 效力을 停止시킬 수 있는 緊急 措置권을 가지게 되었다.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고, 출마 횟수 制限은 없어졌다. 永久 執權을 꿈꾼 박정희는 국민의 강력 한 抵抗을 받았다. 그러나 軍隊를 動員하여 시위를 鎭壓하였고, 헌법 개정을 主張하거나 討論하는 일조차 處罰하였다. 중등 학교 이상 모든 학교에서 학생회를 廢止하고, 학도 호국단이란 軍隊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