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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한편으로는 한국에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기존의 미·일, 한·미 동 맹을 미국 중심의 한·미·일 삼각 동맹 체제로 발전시키길 원했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 개선에는 군사 정부도 적극적이었다. 일본 정부에 식민 통치에 대한 賠償을 요구하여 경 제 개발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1951년 이후 시작과 중단을 거듭했던 한·일 회담은 쿠데타의 주역들에 의해 급속히 마 무리되었다. 그러나 회담의 결과는 국민을 크게 실망시켰다. 일본은 植民 支配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對日請求權이란 이름의 경제 협력 자금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을 지원받는 代價로 이를 默認하였다. 또, 일본이 독도를 한국 領土로 인정하지 않는데도 이를 받아들이는 등 屈辱적인 외교가 계속되었다. 反省하지 않는 일본과 그런 일본에 끌려가는 듯한 한국 정부의 태도에 국민들은 憤怒 하였다. 1964년 3월부터 "한·일 회담 즉시 중지"를 내건 학생과 시민의 시위와 집회가 잇 달았고, 6월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자 박정희는 軍隊를 動員하여 시위를 武力鎭壓하였 다.(6·3 항쟁) 이듬해 6월 兩國 정부는 한·일 협정을 調印하였다. 야당은 '굴욕 외교 반대 '를 내세우며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두 달 뒤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공화당만으로 구성된 국회가 이를 批准하였다. 36년간植民支配를 받았던 댓가는 이처럼 허무하게끝났다. 7·4 남북 공동 성명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정부의 중대 발표가 예고되어 있었다. 기자들 앞에 나타난 이는 이후락은 중앙 정보부장으로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남과 북이 自主的, 平和 的으로 統一하고 思想과 理念의 차이를 넘어 民族的 대단결을 도모한다.'는 내용의 7·4 남북 공동 聲明을 발표하였다. 남북 정상이 합의하고,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이 성명에는 상대방을 非難하 거나 侵略하지 않으며, 平和的으로 交流하겠다는 약속도 들어 있었다. 실로 衝擊的인 발 표였다. 聲明은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공동 성명 발표 이후 남북 조절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남북 정부 대표단이 休戰線을 넘어 평양과 서울을 交換 방문하였다. 남북 대화를 독재 강화에 惡用하다 갑작스런 남북 대화는 미국과 중국의 화해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 1970년 미국과 중 국이 대화를 시작하였고, 1972년에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