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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패들의 폭력으로 다수학생들이 부상을 당한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60년 운명의 4월19일(화)오후 1시 40분경 景武臺 앞에서 武裝경찰이 첫발포를 하여 시민 21명이 射殺당하였고 172명이 중상을 입었다. 4.19일 전국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전국적에서 186명의 死亡者와 727여명 負傷者가 발 생하게 되니 이승만은 非常戒嚴령을 발동하여 鎭壓하려고 戒嚴軍을 전국대도시에 배치하 여 武力鎭壓을 꾀하였으나 軍人들마저 시위대 앞에서 友好的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1960년 4월 25일 독재정권의 만행에 忿怒한 서울 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은 14 개항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示威에 同參하였다. 4월 26일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 시위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 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여 이승만의 下野를 촉구하기 시작하였다. 독재자 이승만의 후 계자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양아들 황태자 이강석이 권총으로 가족 전부를 살해 하고 자살을 하였다. 1960년 4월 26일 혁명의 완성 시위는 계속되어 4월26일 드디어 이승만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나겠다”하야성명이 발 표되어 제1공화국은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張勉 부통령도 사임하자 許政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비밀리에 도주하고만 다. 한국전쟁시 서울을 버리고 야밤逃走를 하고 두번째는 머나먼 이국땅으로 줄행랑을 치고말았다. 제1공화국 이승만은 민중들의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南山을 비롯한 곳곳에 건립된 동 상들은 철거되었고 그의 이름은 독재권력과 殺人魔의 대명사가 되었고 영영 해외에서 不 歸의 객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장면정권이 들어서고 학생들은 곳곳에서 혁명의 성공을 만끽하며 "오라남으로 가자북 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口號를 외치며 사회대변혁을 예고하였다. 진보당은 대학생들과 통일운동을 연계하기 위하여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구성하고 2대악법인 한미경제협정(데모규제법.반공법)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전쟁전후에 이승만정권의 군경에 학살당한 백만피학살유족들도 10여년만에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전국피학살유족회를 창립하고 책임자처벌과 민형사상 배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