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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龜川(구천)인가. 모교명의 변천을 중심으로 서울구천(龜川)초등학교, 서울특별시 구천구(龜川區)는 어떨까요? 강동구에서 최초로 개교 100주년을 맞은 우리 모교는 1921년 개교 당시 학교가 위치한 상일리의 명칭을 따서 상일공립보통학교(九川公立普通學校)라고 했습니다. 일제는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를 소학교로 개칭하는데 이때 리(里) 단위 교명인 상일이 면(面) 단위 교명인 구천으로 바뀌게 되어 구천공립심상소학교(九川公立尋常小學校))가 되었습니다. 이어 1941년 제4차 교육령이 반포되면서 소학교는 국민학교로 개칭되어 구천공립국민학교(九川公立國民學校)로 명명됩니다. 해방되고 1950년 구천국민학교(九川國民學校)로 되었다가 다시 1984년 서울상일국민학교(서울上一國民學校)로 개교 당시의 그 학교명으로 되돌아 가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1996년 정부 방침에 따라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개칭되면서 현 서울상일초등학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원래 상일(上一)이란 교명은 모교가 위치한 이곳의 지명인 상일리(上一里)에서 지명을 따다 쓴 것입니다. 그렇게 교명으로 써오다가 구천(九川)이란 교명으로 바뀐 것은 리(里)의 상위 구역이었던 구천면(面)의 지명을 따서 학교명으로 써왔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상일이라고 하는 리(里) 즉 통(統) 단위 개념으로 낮추어 바뀌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인즉 1984년 당시 임장원 교장 선생을 주축으로 학부모, 지역주민, 동창회의 동의를 얻어 교명을 구천에서 상일로 바꾸고 서울교육청의 승인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그렇게 오래도록 사용하던 교명을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는 우려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천에서 상일로 바뀌는 불운을 맞이했습니다. 개명 이유중의 하나는 '구천'이라는 발음이 사후세계를 의미하는 단어와 음이 같다 하여 즉 어감이 좋지 않다는 단순한 의미만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정책에 의한 우리의 숭고한 뜻이 왜곡되어 바뀌게 된 지명이 하나둘이 아닐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구천( 龜川)'이란 단어도 그중 하나임을 밝히는 바이다. '구천( 龜川)'이라는 단어가 주는 본 의미가 무엇인 줄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쉽게 개명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현 강동구가 1963년 서울로 편입하기 전까지의 옛 지명은 경기도 광주군에 속한 구천면(九川面)이었습니다.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던 지명을 임의대로 바꾼 사례가 많았는데, 구천면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즉 1907년 이전에는 '아홉 구(九)'자가 아닌 '거북 구(龜)'자를 쓰는 '구천면(龜川面)'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구천면(龜川面)이라는 지명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어세겸(魚世謙) 공이 익대공신이 되어 고덕동을 중심으로 한 강동구 일대를 사패지로 받으면서 그 땅을 아버지인 어효첨(魚孝瞻) 공의 아호인 구천(龜川)으로 명명하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렇듯 구천(龜川)이란 지명은 효심의 발로에서 출발한 것이었기에 '구천(龜川)'이란 교명은 더 아쉬움이 크다 하겠습니다. 우리 모교 개교 100주년을 맞으며 교명을 다시금 행각해 보는 이치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일제 청산을 다 했다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명에 대한 고찰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해서 모교 '개교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교명을 효심의 발로에서 기인한 '서울구천(龜川)초등학교'로 다시 원상복귀시키는 운동을 펼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한강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는 방위 명인 강동구(江東區)의 현 지명보다, 원 지명이었으면 효심의 발로인 서울특별시 구천구(龜川區)로 바꾸면 어떨까하는 염원도 덧붙여 봅니다. 우리 모교의 개교 100주년의 의미는 지엄(至嚴)하다 할 것입니다. 강동구에서 처음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 서울'상일(구천)초등학교'의 동문이 정성을 다해 소망하고 실천한다면 교명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구명(區名)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열망으로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동문의 뜻을 모아 발간하는 본서의 책명을 '龜川文集(구천문집)'이라 명명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