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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민주항쟁 1960년 4월 11일 11시경, 3.15의거에서 행방불명이 된 김주열 학생이 27일만에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이곳 중앙부두에 떠올랐다. 김주열의 처참한 시신을 직접 본 마산시민의 분노는 화산처럼 폭발해 4.11민주항쟁(3.15 2차의거)이 일어났다. 4.11민주항쟁은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마산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에 시작되었다. 항쟁에 나선 시민의 수는 3.15의거 때보다 큰 규모로 시위대가 경찰을 압도했다. 이승만정권의 폭정을 담당했던 경찰서, 파출소, 세무서, 시청등의 관공서가 차례차례 점거되고 파괴되었다. 국민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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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구호는 "고문경찰 잡아내라" "살인경찰 처벌하라" "죽은 학생 살려내라"가 주를 이루었다. 그뿐 아니라 "이기붕 죽여라"에 이어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전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다음 날인 4월 12일, 13일에는 마산지역 8개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밤에는 시민들이 데모를 이어갔다. 연 3일 동안 밤낮으로 계속된 '4.11민주항쟁'은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했다. 이승만독재정권은 3.15의거를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난동으로 몰라 시민이 더이상 할거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공포분위기를 만들었다. 4월 11일 마산시민항쟁이 없었다면 4.19혁명은 없었으며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늦어졌을것이다. 4.11항쟁을 '3.15 3차의거'로만 부르는 것은 이 위대한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명이 없으면 그 역사적 가치도 제대로 부여받을 수 없다. '4.11민주항쟁'이라 부르는 것은 창원시민의 긍지와 자부심을 배가시키며 3.15의거의 역사적 위상과 가치를 더욱 높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