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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는 1894년 8월 10일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출생했다. 호는 포석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했다. 1919년 가을경 일본 도쿄 연교학관(硏敎學館)에 들어갔다. 일본 유학생 모임인 동우회(同友會)에 가입했다. 1921년 하기 방학 때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연사로 활동했다.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 등이 조직된 의권단(義拳團)에 몸담았다.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와 밀정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창작 활동을 했다. 1925년 여름 무산계급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몸담았다. 1927년 7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낙동강」에서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향과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근로자로 흘러가거나 북간도 등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한국 농촌의 궁핍상을 날카롭게 묘사하였다. 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연해주에서 1928년 10월에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상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조명희는 1929년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었다.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 1회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5월 11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