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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선조 26년) 1월, 우리 군과 명군은 반격을 펼쳐서 북상했던 왜군을 격퇴하여 서울로 퇴각시켰다. 그러나 왜군은 1월 27일 벽제관 싸움에서 명군을 깨뜰자 다시 사기가 올랐다. 전라도 순찰사 권률장군은 이미 1592년 11월부터 5천의 군대를 이끌고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친 뒤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후방에서 위협하다가 조방장 조경, 승군장 처영과 함께 2천3백의 정예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옮겨 목책을 세원 요새화하고 남하하는 우리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서울에 집결하였던 왜군이 벽제관 승리의 여세를 몰아 3만의 대군을 7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총공격하였다. 인해전술로 물밀듯이 공격하며 선봉대를 교대로 투입하는 왜군을 우리 군은 권률장군의 지휘하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우리 군은 수차의 왜군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고, 왜군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상자를 내게되자 시체를 네곳에 쌓아 불태우고 오후 5시경 퇴주하였다.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인 이 행주대첩은 관순,의병,승군, 부녀자의 총력전으로서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엎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대외 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