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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은 전쟁에 익숙한 자들로서 조총이라 하는 새 무기를 가졌으며 우리나라 군대는 2백년 동안 평화스러운 생활을 하던 농민군으로서 무기다운 무기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싸움은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부산 동래 상주 충주가 연달아 함락되고 정부가 의주로 피난하였으며 전라도와 평안도의 일부를 제외한 전국 방방곡곡이 왜군에게 유린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의 수군을 전멸시키고 육지에서는 권률 장군이 행주대첩을 얻어 차차 전세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인도하였다. 권률 장군은 본래 문신이었으나 장수의 자질을 겸했기 때문에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의 특명으로 전라도 광주목사가 되었으며 7월에 왜군이 금산으로부터 전주로 쳐들어 올 때 이치(梨峙)에서 이것을 막아내어 적으로 하여금 전라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8월엔 전라감사로 승진하였으며 9월에 근왕병 4천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올라가 강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12월에 진지를 수원 독성으로 옮겨 때때로 왜병을 공격하면서 명군을 기다리고 있었다.1593년 1월 8일에 명장 이여송이 4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을 수복하였으나 27일 벽제관 싸움에서 패하여 개성으로 후퇴한 뒤 다시 전진하지 아니하므로 권률 장군은 명군과 연락하여 서울을 수복할 목적으로 2월 11일에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정병 2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양천으로부터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와 토성을 쌓고 목책을 치고 있었다. 이때 서울에는 평안도 황해도로부터 후퇴한 왜병 3만 명이 집결하고 있었는데 12일 새벽에 왜병 우끼다 히데이에가 3만 대병을 총동원하여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로 교대하여 가면서 공격해왔으나 워낙 산성이 높고 가파르며 아군이 고지대에서 활과 총통을 쏘고 돌을 던졌기 때문에 쉽게 쳐 올라 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두울 무렵에 악착같이 달려들어 서북쪽 자성의 목책 한 칸을 파괴하고 쳐들어 왔으며 그곳을 지키던 승군이 조금 물러서려고 하므로 그 찰나 권률 장군이 칼을 들어 물러선 자 두어 사람을 죽이고 독전하여 마지아니하였다. 이에 전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워 마침내 이를 물리치고 다시 목책을 세웠다. 이 싸움은 2천2백의 작은 군대로써 3만의 적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이 물러갈 때 시체 네 무더기를 불사르고 갔는데 아군이 적의 시체를 주운 것이 130이오, 기치와 창검을 얻은 것이 또한 많다 하니 실로 큰 전과이며 이 싸움으로 인하여 아군과 명군의 사기가 일어나 차차 적을 남으로 쫓고 정부가 환도하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을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로 손꼽으며 권률 장군은 그 공으로 도원수가 되어 우리나라 육군을 총지휘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선무일등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장군이 돌아가신 뒤에 행주대첩비를 건립하고 산밑에 기공사를 세워 장군의 영렬을 봉안하였으나 그 동안 모두 황폐하여 볼 모양이 없으므로 금번 박정희대통령의 분부를 받들어 문화공보부가 행주성지를 정화하고 권률 장군의 사당을 새로 지어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 비각과 정자를 지어 장군과 부하장병 및 구국의 결전에 참여한 백성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널리 선양하여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자주의 정신을 길이 계승하고자 한다. 이 비는 1963년 8월15일 당시 재건국민운동경기도지부가 세웠던 것인데 비문에 훼손이 심하여 다시 새기어 세우는 것이다. 큰 글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쓰고 비문은 신석호가 짓고 글씨는 서희환이 쓰다. 1970년 11월 일 출처 : 네이버Blog 열린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