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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건비에 남아있는 글씨와 행주산성 충장사 앞에 세워져 있는 중건비의 비명을 비교해 보면 '원수권공행주대첩비(元帥權公幸州大捷碑)'가 쓰여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건비는 초건비 풍화가 심해지자 헌종 11년인 1845년 초건비와 같은 크기와 비명을 담아 다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위원은 "이미 풍화가 많이 된 본문은 남겨두고 본문보다 글자 크기가 크고 선명한 비명을 일제가 정으로 3분의 2 가량 파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출처 : 연합뉴스 201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