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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비 이곳은 임진왜란때 권률 장군이 적은 군대를 가지고 많은 적을 격타한 전적지이다. 장군의 자는 언신 영의정 권철의 아들이다. 1537년에 출생 1582년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란이 발발한 뒤에 의주 목사에서 광주 목사에 전임되어 전라 순찰사 이광의 휘하에 들어갔으나 이광은 장군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마침내 전군이 궤멸 당하였다. 장군은 광주로 돌아가 군대를 모집하여 금산 이치에 주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적을 크게 격파하여 침입을 저지하였다. 장군은 다시 전라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장군은 곧 군대를 모아서 약4천명을 거느리고 9월에 수원 독성에 주둔하였다. 이때에 적들은 평양 황해도 및 개성을 나누어 점령하였고 후방 부대들은 서울에 모여 있었다.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을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앞에 나아간 적들의 기세를 꺽기위하여 또다시 이듬해 2월 2천3백명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 고양의 행주 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는 중국에서 파견된 대장 이여송이 평양에 있는 적을 격파한 뒤이므로 평양 황해도 개성및 함경도에서 후퇴한 적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해 그 세력이 강대하였다. 장군은 소수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으나 워낙 적은 수였기 때문에 적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달 12일 수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장군은 군중에게 동요하지 말도록 주의시키고 성안에서 활을 쏘며 돌을 굴려서 기어오르는 적을 격파하였으며 적이 목책에 불을 지르면 물을 쏟아서 이를 방지하였다. 일부의 적이 방위가 약간 허술한 쪽으로 들어오자 장군은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세 차례 격전 끝에 적은 마침내 참패하여 전사자의 시체를 네 곳에 모아서 불태우고 달아났다. 이것이 이른바 행주대첩이다. 그해 6월 장군은 도원수에 임명되었고 정유재란에 울산 및 순천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장군은 1599년 63세로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장군을 선무 일등공산에 올려 영가부원군의 칭호와 의정부영의정의 관직과 충장공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1602년 장군의 부하들이 산성에 비를 세웠다. 최림의 글 한호의 글씨에 김상용이 머리글을 썼으며 비 후면에는 장군 사위인 이항복의 추기를 김현성의 글씨로 새기었다. 1842년 조인영의 건의로 나라에서는 장군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한 사당인 기공사를 짓고 여기에 새로 비를 세웠는데 조인영의 글과 이유원의 글 1977년 10월 일 임창순 옮기고 김웅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