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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선생은 친척의 도움을 받아 한학을 독학으로 공부했으며 새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민감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언행이 바르고 어른에게 공손했으며 특히 어머니에게는 순종하고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이런 성격은 그가 18세 되던 1891년에 있었던 일에서 잘 나타난다. 그해 8월, 관리들의 횡포에 못 견딘 농민들이 함창에서 민란을 일으켜 관리들을 벌하고 18일만에 종결되는 사건이 있었다. 10월에 집안의 墓祭(묘제)때 모인 어른들이 피해를 본 관리들을 두둔하며 농민들을 규탄하자 뒤에서 선생이 일어나 "아닙니다. 그런 나쁜 관헌은 죽여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한 어른이 나무라자 말없이 뒤돌섰다고 한다. 開城(개성) 高氏(고씨)와 결혼하여 이미 살림을 따로 차리고 논마지기를 일구던 선생이 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을미의병의 풍랑 속에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절에 쓴 선생의 시 西망(서망)의 한 구절에서 선생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空殻靑山依舊立 自聲流水爲誰鳴 껍질만 남은 청산 예대로 서있는데, 흐르는 물은 누굴 위해 울고 있는고. 선생은 自警詩(자경시)에 스스로를 표현하기를 "성품이 날카롭고 민첩하며 몸이 비록 장대하지는 않았으나 튼튼하고 순박하며 독학으로 한학을 배우고 구김살 없는 기질에 늘 옛날의 충신열사를 숭배하였다"라고 하였다. 1917년 선생의 손으로 처단한 친일 부호 경상북도관찰사 장승원이 죽기 전에 한 증언 "키가 5척 5촌 정도이고, 얼굴이 둥글고 검으며, 눈이 크고, 상투가 있으며, 상주사투리를 썼다"와 일치한다. 청일전쟁이 발발하며 일본군은 상주와 함창에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조선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1894년 9월에 상주, 함창, 예천의 농민군이 합세하여 상주읍내의 관아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고, 충북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이 창의하여 전국으로 퍼져간 의병전쟁은 근방의 문경에서 운강 이강년의 부대가 일어나 친일 방백 안동관찰사와 친일 순검들을 효수하는 일로 번졌다. 이러한 세상의 돌아감에 대해 선생은 마을 누구보다도 먼저 파악하고 있었으며, 농민군과 의병들에 대해 공감하는 발언을 자주 하는 선생을 마을사람들과 친척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 시기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외출이 잦아졌고 일본군 병참에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는 일도 많아졌다. 나이 30 전후해서 그는 가끔 여행을 했다. 선유계곡, 속리산을 다녀왔다고도 하고 또 한번은 예천, 풍기 등을 돌아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영주를 들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 날 다시 병참부대에 끌려가서 밤새 구타를 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1906년, 그가 34살이 되던 해, 봄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풍기면 서부리 한림동으로 이사를 한다. 주변 사람들과 생각이 맞지 않았고 병참부대에 의해 시달리던 생활을 접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사람들이 모이는 풍기에서 그는 새로운 지식도 접하며 생각도 정리를 하게 되었다. 선생은 1907년 8월의 풍기.순흥전투를 경험했고, 또 11월에는 민긍호 부대의 치열한 죽령전투도 경험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였으며 동네 사람들의 부탁을 들여 이장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13년에 동부리 雲田운전마을(구름밭마을)로 이사 와서도 1916년까지 이장을 맡았다.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선생이 1913년에 비밀결사 혁명기관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한위의 기록을 보면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치하고 의병잔당과 모험용사를 불러 대사를 도모하는 의기충천한 문사"라고 되어 있다. 또 만주에서 국가의 미래에 대해 상의하려고 碧濤(벽도) 梁齋安(양재안)을 찾아간 젊은 固軒(고헌) 朴尙鎭(박상진)은 그로부터 "진짜 義士(의사)이며 英雄(영웅)인 풍기의 채기중을 만나보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선생은 1918년 7월 14일에 전라도 목포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주변에서 해외로 망명하라는 권고를 이미 여러 차례 받았으나 선생은 모험용사대의 용의주도함을 굳게 믿어 발각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며, 국내에 일을 두고 떠날 생각은 더우기 없었다고 전한다. 선생은 1919년 2월 28일일에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22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판결을 받았다. 1920년 3월 1일에는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음력 7월 8일에 선생은 동지 강순필, 임세규 등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끝으로, 이 시기 선생이 지은 시 두 편만 부분발췌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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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拘公州以生字押韻 (공주로 이감되어 생(生)자 운으로 시를 짓다) 人末百年有死生 孰能死死孰生生 백년도 못되는 인생 죽음과 삶이 있는데 누가 죽음답게 죽었으며 누가 삶답게 살았는고. 生欲不生生環死 死當死死死環生 살고자 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오히려 죽음이 되며,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는 죽음은 죽음이 오히려 삶이로다. 追謝雲田諸益義捐 (의연금을 내주신 구름밭마을의 여러 벗에게 감사드리다) 惠及縲中難報地 諠爲天下不忘人 은혜가 옥중에 미쳤지마는 보답할 길이 없는 처지이니, 마땅히 천하에서 잊지 못할 사람들이요. 如何移得同人信 化以歸來內外人 어떻게 하면 동지들의 소식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서 죽어서 돌아올텐데, 선생이 살던 풍기읍 동부리 251번지에서는 1960년대 초에 탄환 수천 발이 들은 장독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그 행방은 현재 묘연한 상태이다.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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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단 초대 단장,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 선생 채기중은 1873년 음력 10월 7일에 경상북도 함창 소암1리에서 부친 채獻洛(채헌락)과 모친 曲阜(곡부) 孔氏(공씨)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